박정희, 만주군 ‘혈서(血書)지원’ 사실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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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만주군 ‘혈서(血書)지원’ 사실로 밝혀져
  • 인터넷뉴스팀
  • 승인 2009.11.06 00:42
  •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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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민족문제연구소
만주군관학교 지원 때 “죽음으로 충성” 혈서 사실로

혈서 “목숨을 다해 충성 다할 각오이다” 만주군 지원

연구소 “이성적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 삼고자 한다”

[매일일보] 그간 말로만 전해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발굴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4일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 기사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은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재차 응모한 것으로 나타난다. 편지 내용도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 등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의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다.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연구소가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가 지난 10월 28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지가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관련 보도가 나간 뒤 연구소에는 욕설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연구소는 특정 정치인의 입지와 무관하게 1991년부터 편찬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도 해방 이후 60년이 넘도록 미결 상태로 끌어왔던 친일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학문적 정리를 마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듯이 왜곡하는 일부 의견에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근거 없는 비난을 방치할 때 민족사 정립이라는 대의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박지만 씨는 4일 북부지원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를 추가하여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제출한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의 요지는 “1. 박정희는 만주군이었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며, 2. 만주군의 주적은 마오쩌뚱의 팔로군이었으므로 박정희는 만주국의 용병이 되어 중국공산당과 싸운 셈이며, 3.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1.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2.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가 군관을 거듭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4. 엄밀히 말해서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적국의 장교이다. 5.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으로 볼 수 없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으로 이해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변론을 준비 중이다. 연구소는 혈서지원 ‘만주신문’ 기사와 함께,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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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 2009-11-08 06:05:18
신문을 다 믿읍니까? 그러면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당시 신문들은 다 폭도들이라고 했는데 폭도 맞습니까? 그렇습니까?

스카이콩콩 2009-11-06 15:24:01
출처가 만주신문이라고 하는데 ..
만주일보와 만선일보는 알고 있지만 만주일보는 생소한 신문이다

조갑제에의한 혈서설은 1938년 5월인데 만주일보 혈서 기사는 1939년 3월 31일
날자가 맞지 않는다

김선대 2009-11-06 13:05:13
조국을 위해 힘쓴사람들은 투옥, 암살되고 친일 부일했던사람들은 잘먹고 유산빵빵하게 남겼지요 우리역사가 그래요. 역사에 죄인들이 큰소리 뻥뻥 치고 사는세상~~아 영원하라 매국노여~~

굴욕의 역사 2009-11-06 13:03:33
어릴때는 정말 대단한 위인인줄로만 알았다...

알면알수록 흉하구나...

지금도 흉한 사람들이 판치니...

부끄럽다.. 2009-11-06 10:42:10
친일, 쿠데타, 정경유착, 한일 비밀협정, 호색, 유신.......
늙은이들이여...곱게 가라...

인생의 끝이 흉하면 그만큼 꼴보기 싫은 것도 없다.

박정희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답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