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구제역 ‘살처분’ 트라우마 자살, 업무상 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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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구제역 ‘살처분’ 트라우마 자살, 업무상 재해”
  • 강시내 기자
  • 승인 2013.11.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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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생매장 작업 강요…축협, 사표도 반려해
▲ 2011년 1월 16일 오후 서울 명동에서 소·돼지·닭 가면을 쓴 한국동물보호연합 회원들이 ‘구제역 생매장 중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매일일보] 구제역 발생 당시 가축 살처분에 참여했다가 받은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축협은 해당 직원이 생매장 작업의 충격으로 건강을 잃어 제출한 사표도 반려했고, 결국 숙직실에서 참변이 발생했다.

지난 2010년 11월 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전국 11개 시·도 75개 군으로 퍼져 나갔고, 가축 348만여 마리가 매몰처분됐다. 당시 안락사용 약물이 초기에 바닥나면서 가축을 생매장해야 했고, 각계에서 농가는 물론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 등이 겪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2001년부터 충청남도의 한 축협에서 일해온 정아무개씨는 2010년 12월 말 당진에서 구제역이 발생하자 동료들과 함께 가축 매몰 작업에 투입됐다. 갓 태어난 어린 가축을 포함한 소·돼지를 산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야 했던 정씨는 그 일로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정씨는 동료에게 ‘자다가도 악몽을 꾸고 놀라서 깬다’거나 ‘이러다 벌 받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힘든 심정을 토로했지만 이후에도 2011년 9월까지 매몰지를 방문해 흘러나오는 침출수 제거 작업을 해야 했다.

이 무렵 정씨는 불면증으로 하루 2∼3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조울 증세에 위염과 십이지장궤양 등 건강상 문제도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끝에 사표를 냈지만 축협 측은 정씨의 사표를 반려했다.

정씨는 결국 2011년 10월 숙직실에서 동물 마취용 근육이완제를 주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족들은 이듬해 2월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4일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윤인성 부장판사)는 정모씨 유족이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정씨가 구제역 매몰작업 이후 우울증을 의심케 하는 폭력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불면증과 위염 등 증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정씨가 살처분으로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살처분 트라우마 등으로 인한 극단적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정신적 억제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어 업무상 재해가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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